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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화폐

CBDC와 DLT: 무엇이 다른가?

기술 용어의 혼동이 만든 금융 개념의 오해

최근 전 세계적으로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의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행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법정통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기술적 검토와 정책 실험을 병행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많이 언급되는 기술 용어가 있다. 바로 DLT(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분산원장기술)이다. CBDC 관련 보도나 보고서에서 “블록체인 기반”, “분산원장 도입”, “DLT 실험” 등의 문장이 함께 사용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DLT와 CBDC를 혼용하거나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CBDC는 ‘결과물(디지털화폐)’이고, DLT는 ‘기술(시스템 구조)’이다. 이 둘은 목적, 작동 원리, 법적 지위, 통제 방식 등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글에서는 CBDC와 DLT의 차이를 명확히 정리하고, 각 개념이 가진 기술적·정책적 의미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디지털 금융 시대의 핵심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CBDC와 DLT: 무엇이 다른가?


CBDC의 개념과 목적: 국가가 설계하는 새로운 법정통화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화폐다. 종이 화폐(현금)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가지며, 국가가 보증하는 자산으로 인정받는다. 기존의 지폐나 동전이 물리적 형태라면, CBDC는 전자적 형태로 발행되어 디지털 지갑에 저장되고, 온라인·오프라인 환경에서 사용 가능하다.

CBDC는 국가의 통화주권과 금융시스템 안정성 유지를 위한 정책 수단으로 고안되었으며, 그 목적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현금 사용 감소에 대응한 새로운 통화 수단 제공, ▲금융 포용성 확대, ▲자금세탁 및 불법 거래 방지, ▲통화정책의 정밀도 향상, ▲글로벌 결제 인프라 개선 등이 있다.

중앙은행은 CBDC를 발행하고 관리하는 주체로서, 시스템 전반에 대한 통제권과 책임을 동시에 가진다. 이 말은 곧, CBDC가 채택하는 기술은 중앙은행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설계 가능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블록체인을 사용할 수도 있고, 기존 중앙 집중형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즉, CBDC는 기술에 종속된 개념이 아니라, 목적과 정책에 따라 구현되는 ‘통화 시스템’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DLT는 그 중 하나의 구현 기술일 뿐이다.


DLT의 개념과 구조: 탈중앙화된 데이터 공유 방식

DLT는 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즉 분산원장 기술의 약자다. DLT는 거래 데이터를 한 곳에 집중 저장하지 않고, 여러 참여자(노드)가 동시에 복사본을 보유하고, 합의를 통해 기록을 유지하는 방식의 기술 구조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DLT 구현 사례가 바로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DLT의 한 형태로, 데이터를 ‘블록’ 단위로 묶고 이를 ‘체인’처럼 연결하여 시간 순서대로 저장한다. 이더리움, 비트코인 등 대부분의 암호화폐가 사용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DLT는 블록체인보다 더 넓은 개념이며, 코다(Corda), 하이퍼레저 패브릭(Fabric)과 같은 비블록체인 방식의 분산원장도 DLT에 포함된다.

DLT의 핵심은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참여자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아도, 일정한 합의 알고리즘을 통해 데이터의 정합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DLT는 ▲투명한 거래 기록, ▲조작 방지, ▲보안성 강화 등의 이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DLT는 기술일 뿐, 그 자체가 화폐는 아니다. DLT는 디지털 화폐의 인프라가 될 수 있지만, 국가의 보증이나 법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CBDC는 DLT 위에 구축될 수도 있지만, DLT가 CBDC 그 자체는 아니다.


CBDC와 DLT의 본질적 차이: 목적, 통제, 신뢰 기반의 차별성

CBDC와 DLT의 가장 큰 차이는 존재 목적과 신뢰 기반의 구조에 있다.
CBDC는 국가가 통제하고, 신뢰를 보장하는 중앙 집중형 모델에 가깝다. 설계 구조가 분산되어 있더라도, 최종적인 발행 주체와 정책 결정권은 중앙은행에 있다. 이는 CBDC가 어떤 기술을 기반으로 하든지 간에 법적 책임과 화폐 기능을 국가가 보유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반면, DLT는 특정 중앙기관 없이 운영되는 비신뢰 기반 시스템을 목표로 한다. 모든 노드는 동등한 권한을 가지며, 합의 알고리즘을 통해 거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즉, DLT는 신뢰를 코드로 대체하는 구조이며, ‘코드를 신뢰한다’는 개념에 더 가깝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점이 발생한다:

구분 CBDC DLT
주체 중앙은행(정부) 네트워크 참여자(노드)
신뢰 기반 법적 권위, 정책 알고리즘, 코드
목적 통화 정책, 금융 안보 데이터 투명성, 탈중앙 운영
책임 주체 국가 없음 (분산 책임)
구조 중앙 설계 기반 + 일부 분산 완전 또는 부분적 분산 구조

이러한 차이로 인해 CBDC에 DLT를 적용할 때는 기술적 조정이 필요하다. 완전한 탈중앙형 퍼블릭 블록체인은 CBDC와 충돌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프라이빗 DLT 또는 컨소시엄 구조의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택하고 있다.


결론: CBDC와 DLT는 겹치는 듯 다르고, 연결되되 동일하지 않다

CBDC와 DLT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CBDC는 디지털 법정화폐라는 정책적 결과물이며, DLT는 그 결과물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CBDC는 DLT 없이도 구축될 수 있고, DLT는 CBDC가 없어도 독자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중앙은행은 기존 중앙 시스템 구조에 CBDC를 구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일부 민간 기업은 DLT를 이용해 공급망 관리, 계약 관리 등 금융 외 영역에 응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디지털 금융 인프라는 점점 CBDC + DLT가 결합된 형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중앙은행은 완전한 탈중앙화가 아닌, 통제 가능한 DLT 기반 시스템을 통해 정책 유연성과 기술 투명성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CBDC는 국가의 경제 전략이고, DLT는 그 전략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금융 시대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