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DC에 적용된 DLT 사례 비교
디지털화폐의 인프라, DLT가 선택받는 이유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통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은 기술적 실험과 정책 설계를 병행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DLT(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분산원장기술)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DLT는 거래 정보를 중앙 시스템이 아닌 여러 노드(참여자)가 공동으로 기록하고 검증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본래 탈중앙화와 신뢰 없는 거래 환경을 위해 탄생했지만, 중앙은행은 이를 커스터마이징하여 자신들의 정책적 목적과 기술적 요구에 맞게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DLT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다. CBDC에 도입된 DLT는 나라마다 구조, 설계 목표, 파트너 기업, 기술 구현 방식이 다르다. 어떤 나라는 하이퍼레저를 선택했고, 어떤 국가는 코다(Corda)를, 또 어떤 국가는 자체 블록체인을 개발하거나 아예 DLT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글에서는 CBDC에 실제 적용된 DLT 사례를 국가별로 비교 분석하고, 어떤 기준과 목적에 따라 플랫폼이 선택되었는지를 살펴보며, 향후 글로벌 CBDC 생태계가 어떤 방향으로 정착될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중국: 디지털 위안화는 DLT를 일부 활용한 중앙 집중형 설계
중국은 CBDC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앞서가고 있는 국가 중 하나로, 디지털 위안화(e-CNY)는 이미 여러 도시에서 시범 운영되고 있으며, 교통, 공공요금, 유통, 정부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실생활 영역에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중국 인민은행은 디지털 위안화의 기본 인프라에서 전통적인 블록체인(DLT)를 전체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이브리드 구조를 택하여 일부 기능에서만 DLT를 활용하고 있다.
디지털 위안화의 구조는 중앙은행(1차 계층)이 화폐를 발행하고, 상업은행 등 민간기관(2차 계층)이 이를 유통하는 이중 계층(two-tier)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일부 유통 기록이나 스마트 계약형 기능에 한해 DLT 기술을 보완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의 선택은 확장성과 통제권 확보를 최우선에 두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분산원장은 처리 속도와 통제력 측면에서 한계가 크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중앙 서버 기반의 구조에 DLT를 부분적으로만 도입하는 실용적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사례는 DLT가 반드시 전체 시스템을 대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DLT의 전략적 부분 활용’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프랑스·유럽중앙은행(ECB): 하이퍼레저 기반의 실험적 검증
유럽중앙은행(ECB)과 각 유럽 회원국들은 디지털 유로(CBDC)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며,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은 특히 DLT 기반의 CBDC 파일럿 프로젝트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는 실험을 위해 하이퍼레저 패브릭(Hyperledger Fabric)과 R3의 코다(Corda), 그리고 이더리움 기반 Quorum 등 여러 DLT 플랫폼을 동시에 테스트하고 있으며, 민간 파트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CBDC의 기술적, 법적, 정책적 가능성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하이퍼레저 패브릭은 프라이빗 블록체인 구조로, 고속 거래, 기밀성 유지, 모듈화된 아키텍처를 지원하며, 유럽이 요구하는 GDPR(유럽 개인정보 보호법) 요건에 부합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된다. 반면 코다는 거래 상대방 간의 프라이버시 보장과 규제 준수를 동시에 고려한 플랫폼으로, 금융기관 간 도매형 CBDC 실험에 적합하다.
유럽의 사례는 여러 DLT 기술을 병렬적으로 실험하여 최적의 조합을 찾으려는 전략적 접근을 보여준다. 또한, 유럽은 단순한 기술 구현을 넘어 법적 체계와 사회적 수용성까지 고려하는 정책 중심의 실험 설계가 돋보인다.
한국: 다양한 DLT 실험을 통한 유연한 플랫폼 접근
한국은행은 2021~2022년을 기준으로 CBDC 기술 실험을 2단계에 걸쳐 진행했으며, 실험 환경에서 DLT 기반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특히 1단계에서는 하이퍼레저 패브릭을 기반으로 CBDC의 발행, 유통, 회수 과정과 기본적인 결제 시나리오를 테스트했다.
2단계에서는 DLT의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실험했다. 예를 들어 ▲오프라인 결제 기능, ▲스마트 계약 기능, ▲디지털 자산과의 연계성 등을 검토했으며, 여기에는 LG CNS, 카카오, 삼성 SDS 등 국내 주요 기술기업이 참여했다.
한국은행은 DLT의 구조를 일방적으로 채택하기보다는, CBDC에 필요한 기능을 중심으로 어떤 기술이 가장 적합한지 판단하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보였다. 예를 들어 오프라인 기능은 블록체인이 아닌 NFC나 BLE 기반의 하드웨어 솔루션이 더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기도 했다.
결국 한국의 실험은 DLT가 CBDC에 일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CBDC는 반드시 블록체인 기반일 필요는 없으며, 상황에 따라 유연한 기술 결합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결론: DLT는 필수가 아닌 ‘선택 가능한 도구’일 뿐이다
CBDC와 DLT는 자주 함께 언급되지만, 앞선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DLT는 CBDC의 필수조건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구현 수단 중 하나다. 중국처럼 중앙 집중형 시스템에 DLT를 부분 활용한 경우도 있고, 프랑스처럼 여러 DLT를 실험적으로 비교한 경우도 있으며, 한국처럼 기능 중심의 기술 선택을 한 나라도 있다.
즉, CBDC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기술을 썼는가’보다 ‘어떤 목적과 정책적 방향성에 맞는 기술을 어떻게 설계했는가’다. 국가마다 통화정책 목표, 금융 인프라 수준, 개인정보 보호 기준, 기술 자립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DLT의 도입 여부와 방식도 반드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의 흐름을 보면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퍼블릭 블록체인보다는 프라이빗 또는 컨소시엄 형태의 DLT를 선호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하이브리드 구조(중앙 집중형 + DLT)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결론적으로 DLT는 CBDC 시대의 핵심 기술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CBDC 자체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각국은 앞으로도 기술 실험과 정책 시뮬레이션을 통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인프라를 찾아 나갈 것이며, 이 과정에서 DLT는 계속해서 전략적 선택지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