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반의 CBDC, 과연 가능할까?
블록체인 기술이 국가 화폐를 움직일 수 있을까?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의 도입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핵심 아젠다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을 비롯해 미국 연준, 유럽중앙은행, 중국 인민은행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이미 CBDC 발행을 위한 기술 실험을 시작했으며, 일부 국가는 시범 운영 단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기술적 요소가 바로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와 불변성, 보안성, 투명성 등의 장점을 지닌 기술로, 암호화폐를 탄생시킨 기반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운영하는 화폐 시스템에 블록체인이 적용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를 지향하고, 중앙은행은 중앙 통제를 기본으로 한다. 이 두 시스템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블록체인 기반 CBDC의 기술적 가능성, 국가별 도입 사례, 장점과 한계, 그리고 현실적인 설계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블록체인의 기본 개념과 CBDC에 적용될 수 있는 구조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블록 단위로 저장하고, 각 블록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방식의 분산원장 기술이다. 모든 참여자가 거래 내역을 공유하고, 특정 참여자가 독점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 이 기술은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의 핵심 기술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더리움, 솔라나, 리플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응용되고 있다.
CBDC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특히 거래 내역의 불변성, 투명한 기록, 빠른 정산 가능성 등은 CBDC가 지향하는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라는 목표와 부합한다.
CBDC에 적용 가능한 블록체인 구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 퍼블릭 블록체인 –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완전한 탈중앙 시스템(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중앙은행과는 맞지 않음.
- 프라이빗 블록체인 – 중앙기관이 통제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 중앙은행이 직접 운영 가능.
- 컨소시엄 블록체인 –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이 공동으로 노드를 운영하는 구조. 기술적 효율성과 정책적 안정성의 균형을 도모함.
현재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프라이빗 또는 컨소시엄 방식의 블록체인을 CBDC에 적용하려 하고 있으며, 완전한 퍼블릭 블록체인 도입은 사실상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즉, 블록체인 기술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며, CBDC에 맞게 '조정된 형태'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블록체인 기반 CBDC의 장점: 왜 필요한가?
블록체인을 CBDC에 적용하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장점은 투명성과 신뢰성이다. 모든 거래 내역이 실시간으로 기록되며 조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금세탁, 탈세, 불법 자금 유통 등의 금융 범죄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또한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간의 정산 속도 향상, 국제 송금 처리 간소화, 시스템 장애 시 빠른 복구 등 실질적 효율성도 높다. 블록체인은 중앙 집중형 시스템과 달리, 한 개의 노드가 장애를 일으켜도 전체 네트워크가 유지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특히 컨소시엄 블록체인을 사용할 경우,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이 각자의 노드를 운영하면서 거래 기록을 동시에 공유하고 검증할 수 있어, 중앙 통제와 분산된 운영의 절충안으로 기능한다. 이는 중앙은행이 통제권을 놓지 않으면서도, 기술적 투명성과 효율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스마트 컨트랙트 기능을 적용하면 조건부 복지 지급, 기한 내 사용 조건 설정, 자동 환급 시스템 등 다양한 정책 수단도 정밀하게 구현할 수 있다. 이런 기능은 현행 시스템에서는 매우 복잡하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블록체인 기반 CBDC의 한계와 기술적 도전 과제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CBDC에 모든 면에서 적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CBDC의 특성과 상충되는 요소도 적지 않다. 첫 번째 문제는 바로 확장성(Scalability)이다. 블록체인은 모든 거래를 블록에 기록하고, 이를 네트워크 전체에 전파하기 때문에, 대량의 트랜잭션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은 초당 7건, 이더리움은 약 30건 정도의 거래만 처리할 수 있다. 반면, 기존 카드 결제 시스템은 초당 수천 건 이상을 처리한다. 따라서 전 국민이 사용하는 CBDC 시스템에서 블록체인이 이와 같은 성능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
두 번째는 프라이버시와 데이터 보안 문제다. 블록체인은 거래 내역이 모든 노드에 저장되기 때문에, 완전한 개인 정보 보호는 어려울 수 있다. 물론 ZKP(제로 지식 증명) 등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실용화와 정책 적용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에너지 효율과 운영 비용이다. 특히 합의 알고리즘(PoW, PoS 등)에 따라 처리 속도, 보안, 에너지 소모량이 달라지며, 이는 시스템 설계의 복잡성을 가중시킨다. 중앙은행은 기술적 안정성과 비용 효율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블록체인 채택에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는 기술 표준의 부재다. 현재 각국이 독자적인 기술 실험을 진행하고 있지만, 국제 결제 시스템과 호환되는 기술 표준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국가 간 CBDC 상호 운용성 확보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결론: 블록체인 기반 CBDC, 가능은 하지만 ‘조건부’로
블록체인 기반의 CBDC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실제로 한국은행, 중국 인민은행, 스웨덴 중앙은행 등 다수의 중앙은행이 블록체인 실험을 통해 일정 수준의 성능과 보안성을 입증했다. 특히 컨소시엄 블록체인 방식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구조로 평가받고 있으며, 다수의 민간 기업과 금융기관이 이 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과 ‘실현’은 다른 문제다. CBDC는 단순한 기술 프로젝트가 아니다. 국가 경제 시스템, 금융 안정성, 시민의 프라이버시, 통화 주권 등 수많은 복합 요소가 얽혀 있는 정책적 선택이다.
따라서 블록체인을 CBDC에 전면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초당 수천 건 이상의 트랜잭션을 처리할 수 있는 확장성 확보
- 실명과 익명성의 균형을 고려한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 채택
- 중앙은행이 통제 가능한 구조 하의 하이브리드 블록체인 설계
- 민간과의 협력 구조를 포함한 운영 거버넌스 체계 구축
- 국제 표준과의 연계성을 고려한 호환성 기반 기술 설계
결국 블록체인은 CBDC 구현을 위한 핵심 기술 중 하나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중앙은행은 기술적 유연성과 정책적 목적을 모두 고려한 복합적 접근을 통해 CBDC를 설계해야 한다.
따라서 “블록체인 기반 CBDC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정책적, 제도적, 사회적 합의가 선행될 때에만 실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