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DC가 상업은행에 미치는 충격: 은행의 미래는?
디지털 화폐가 몰고 올 ‘금융 권력의 재편’
디지털 전환의 흐름은 단순히 기술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산업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특히 금융 산업은 디지털화에 따라 가장 큰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현금의 사용이 줄고, 간편결제가 일상이 되면서 기존 금융기관의 역할과 영향력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등장한 것이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로, 블록체인 기반 또는 중앙 시스템 기반으로 작동하며, 실물 화폐와 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다. 현재 한국을 비롯해 중국, 유럽, 미국 등 세계 주요국들이 CBDC 발행을 위한 실험과 정책 검토에 돌입했다.
하지만 CBDC의 등장은 단순한 디지털 혁신을 넘어, 금융 권력의 재편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기존 통화 공급과 금융 서비스의 핵심을 담당해온 상업은행(시중은행)이 더 이상 유일한 화폐 유통 채널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CBDC 도입이 상업은행의 구조, 수익 모델, 사회적 역할에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향후 은행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기존 상업은행 시스템의 역할과 구조
상업은행은 오랫동안 현대 금융 시스템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통화 공급 측면에서는 중앙은행으로부터 발행된 기초 통화를 바탕으로 대출을 통해 신용을 창출하고, 그 과정을 통해 실제 유통되는 자금의 90% 이상이 시중은행을 통해 공급된다.
또한 상업은행은 지급결제, 예금 관리, 대출 서비스, 외환 거래, 금융상품 판매 등 복합적인 금융 인프라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은 은행이 고객의 자금을 예치받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을 얻는 구조를 형성한다.
결국 은행은 통화의 중개자이자, 금융 거래의 허브, 개인과 기업 간 자금 흐름의 교차로로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CBDC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이 전통적인 역할이 구조적으로 도전받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며,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연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개자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은행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CBDC가 상업은행에 미치는 주요 충격
CBDC 도입이 상업은행에 주는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예금 유출과 금융중개 기능의 약화다. 현재 대부분의 은행은 고객 예금을 기반으로 대출을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창출한다. 그러나 CBDC가 도입되면, 고객은 시중은행이 아닌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를 보유할 수 있게 되며, 별도의 은행 계좌 없이도 금융 활동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정부가 CBDC 지갑을 국민에게 직접 제공한다면, 시민은 굳이 시중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지 않아도 되고, 예금을 유지할 필요도 없어질 수 있다. 이는 시중은행의 예금 기반 약화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대출 여력 감소, 수익성 저하, 유동성 위기 등의 리스크를 야기할 수 있다.
또한, CBDC는 지급결제 시스템도 중앙은행 주도 구조로 재편할 수 있다. 지금은 카카오페이, 토스 등 민간 플랫폼과 시중은행이 지급결제의 중간자 역할을 수행하지만, CBDC는 정부 주도의 통합 결제 플랫폼에서 직접 작동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존 은행들이 수행하던 지급결제 기능도 축소된다.
요약하자면 CBDC의 도입은 다음과 같은 충격을 상업은행에 줄 수 있다:
- 예금 감소 → 대출 기반 약화
- 결제 수단 경쟁 격화 → 플랫폼 역할 축소
- 거래 데이터 축적권 상실 → 고객 이해도 약화
- 정책 금리에 의한 시장 금리 왜곡 가능성 → 이자 수익 모델 흔들림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단기적으로 은행의 생존 전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상업은행의 대응 전략과 진화 방향
CBDC의 도입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업은행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해야 할까? 우선 가장 현실적인 전략은 CBDC 생태계에의 ‘적극적 참여’다. 한국은행 역시 CBDC 설계 과정에서 시중은행을 중개기관으로 포함시키는 이중 계층(two-tier) 모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모델에서는 상업은행이 여전히 사용자 지갑 관리, KYC(고객확인), AML(자금세탁방지) 등을 담당한다.
이 경우, 은행은 단순한 예금·대출 기관이 아니라, CBDC 기반 금융 서비스 플랫폼 운영자로 변신하게 된다. 예를 들어, CBDC 지갑에 다양한 자산 관리 기능을 탑재하거나, 디지털 자산 기반 투자 상품을 제공하는 등의 ‘금융 서비스 플랫폼화’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은행은 고객 신뢰와 데이터 기반 금융 서비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CBDC의 사용이 확산되면, 고객 데이터가 중앙으로 집중될 수 있는데, 은행은 고객 맞춤형 서비스, 자산 분석, 리스크 관리 역량을 통해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은행은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와의 연계를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해외 CBDC 간의 상호 연동 시스템이 생긴다면, 시중은행은 국제 송금, 외환 거래, 글로벌 투자 상품 등에서 핵심 중개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
즉, 은행은 전통적인 ‘돈의 창고’에서 디지털 금융의 허브이자 신뢰의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결론: CBDC는 은행의 종말이 아닌 재정의의 시작
CBDC의 등장은 상업은행에게 분명 위기다. 수세기 동안 유지돼온 은행 중심의 금융 질서가 중앙은행과 개인 간의 직접 연결 구조로 바뀌는 것은, 은행에게 있어 존재 이유를 되묻게 만드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위기는 곧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CBDC가 전통 금융 시스템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고 진화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면, 은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중앙은행이 기술과 정책의 한계로 인해 모든 국민과 직접 상호작용을 하긴 어렵기 때문에, 중개자로서의 은행의 존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 나아가, 은행은 CBDC 시대에 맞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가치 제공 방식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단순히 돈을 보관하고 빌려주는 기관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의 핵심 인프라로서 신뢰, 보안, 서비스, 맞춤형 금융솔루션을 제공하는 존재로 재정의돼야 한다.
결국, CBDC는 은행의 종말이 아닌, 은행이라는 개념의 재정의 과정이다. 앞으로의 금융 환경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신뢰 중심의 플랫폼 경쟁 시대가 될 것이며, 그 안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는 은행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가장 정확하게 미래를 읽은 은행이 될 것이다.